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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여름은 너무도 뜨거웠다

by 조한일 2024. 11. 3.

선풍기 바람이 미지근하게 느껴지던 그 해 여름, 우리는 역사적인 폭염과 마주했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1994년, 한반도를 덮친 최악의 더위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었습니다. 

1994년 뉴스보도

 

 

요즘 젊은 세대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가정용 에어컨은 흔한 가전제품이 아니었습니다.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이 고작 0.14대, 즉 100 가구 중 17 가구만이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었죠, 지금처럼 가정마다 한 대씩(0.94대) 있는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도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거실에는 14인치 선풍기 한대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래도 각자 방에는 선풍기가 있었네요!  이러한 더위는 특히 잠들기 전, 선풍기 타이머를 2시간 으로 맞추고 잠이 드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밤중에 땀에 젖어 깨면 다시 타이머를 돌리던 기억이 납니다.

 

 

그해 7월 초부터 폭염은 시작됐습니다.평소 같으면 장마철이라 비가 내려야 할 시기였지만, 하늘은 맑기만 했습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33도를 넘어서는 기온을 보도했고, 폭염 특보는 일상인 그 해 여름이었죠

특히 7월 11일부터 20일까지의 10일은 최악이었던 기록입니다. 평균기온이 무려 38.3도를 기록했으며, 대구는 무려 39.4도까지 올라가며 광복 이후 최고 기온을 기록했습니다. 아스팔트는 말 그대로 '달구어진 프라이팬'이었고, 계란을 깨면 정말 익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던 한반도였습니다.

 

 

도시의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한낮에는 거리가 텅 비었고, 사람들은 에어컨이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로 피서를 갔습니다.'에어컨 난민'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하철역이나 은행 로비는 더위를 피하려는 시민들로 북적였었습니다.

직장인들은 더 힘들었을 겁니다. 에어컨이 없는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그 시대였죠

정부는 '넥타이 풀기 운동'을 전개했지만, 보수적인 회사문화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양복 재킷을 벗는 것 초자 눈치 보이던 그 시절이었으니까요.

1994년 열대야

 

밤이 되어도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25도 이상의 열대야가 무려 16.6일이나 계속되었으니까요.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한밤중에도 동네공원이나 한강변으로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한적한 공원이 밤에 오히려 북적이는 진풍경을 자아냈었죠

아이들은 책상 위에 얼음을 담은 대야를 올려두고 공부했습니다. 선풍기 바람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때면, 얼음물에 수건을 적셔 목에 두르는 것이 우리의 작은 더위 생존법이었습니다.

 

 

남부지방은 가뭄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작물은 말라죽어갔습니다. 농부들은 농사 걱정에 담배 한 모금 하시던 방송사의 촬영모습이 기억납니다. 도시에서도 생활용수가  부족해 소방차가 식수를 공급하는 광경이 기억납니다.

 

 

7월 말, 하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준 걸까요? 7호, 11호 , 13호 태풍이 연달아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면서 단비가 내렸습니다. 보통은 태풍을 대비하고 두려워하였지만, 그때만큼은 달랐습니다. 농민들은 이를 '효자 태풍'이라 부르며 환영했었죠. 메마른 땅을 적시는 비를 보며 축제 분위기까지 연출됐으니까요

1994년 한강다리밑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에어컨 없이 선풍기와 부채만으로 38도가 넘는 폭염을 버텨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견뎌냈는지 하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가정에 에어컨이 있고, 폭염에도 비교적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94년의 그해 여름은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불편했지만 모두가 함께 견뎌냈고, 그 속에서 나름의 추억도 만들었으니까요

 

더운 여름이 찾아올 때마다 저는 가끔 그때를 떠올립니다. 선풍기 앞에서 부채질하며 드라마를 보던 가족들, 동네 골목에 모여 수박을 나눠 먹던 이웃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1994년의 폭염은 분명 힘든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의 의미 배웠고,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도 알게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며, 우리가 얼마나 강인했는지, 또 얼마나 따뜻했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